광우 큰스님

한국불교의 살아 있는 역사,
광우(光雨) 큰스님

떠나는 바람은 집착하지 않는다.
그저 왔다가 갈 뿐


-광우큰스님의 열반게
대한불교조계종 명사 태허당 광우스님은 한국 현대불교사에서 우뚝한 원로 비구니 큰스님이십니다. 1958년 성북구 삼선동 망월산에 정각사를 창건한 이래 불교계뿐만 아니라 여성, 학술, 복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크게 활동하셨습니다. ‘한국불교의 살아 있는 역사’로 불릴 만큼 스님이 경영해온 삶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1940년 국내 최초의 비구니 강원인 상주 남장사 관음강원의 최초 졸업생인 스님은, 1956년 비구니로서는 최초로 4년제 정규대학(동국대)을 졸업했습니다. ‘양복 입고 대학에 다닌 비구니’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던 스님은 2007년에는 최고의 비구니 스승에게 수여하는 ‘명사(明師)법계’를 역시 최초로 받으셨습니다.

광우스님은 이 시대를 위한 참다운 불교의 역할, 나아가 종교의 올바른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셨습니다. 스님은 불교계에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양로원, 고아원 등의 복지시설을 건립하며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일이야말로 불교가 해야 할 역할이라며 전국 곳곳에 흩어져있는 비구니 스님들이 이런 일에 앞장서도록 독려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비구니를 하나로 결집하고 전문적인 교육기관을 건립하여 전문적인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광우스님은 1968년 2월, 뜻을 같이 하는 스님들과 함께 전국비구니회의 전신(前身)인 ‘우담바라회’를 결성하였습니다. 우담바라회의 사업목표는 우선 비구니스님들이 활동할 수 있는 비구니회관을 건립하고, 이를 기반으로 교육, 포교, 사회복지 사업을 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실천하는 불교, 이웃들과 함께 하는 불교를 만드는 일에 비구니가 앞장서야 한다’는 광우스님의 원력은 결국 전국 비구니 스님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1985년, 마침내 역사적인 전국비구니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광우스님은 1995년부터 제6대, 7대에 걸쳐 8년 동안 전국비구니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비구니 스님들의 숙원사업이었던 전국 비구니회관 건립을 주도했습니다.

1958년 정각사를 창건할 당시만 해도 서울 도심에 위치한 사찰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스님은 정각사를 창건한 초기부터 당시로는 드물게 어린이법회와 중고등학생법회, 대학생법회까지 개설해서 정각사가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젊은 청년들에게 안식처가 되도록 했습니다. 당시 정각사는 당대 최고의 불교학자로 명성이 높던 김동화 박사님을 비롯해 홍정식, 원의범, 황성기, 홍영진, 김대은 박사 등을 모시고 강의를 열었고, 서울시내 유수한 대학의 학생들이 이 강의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이 밖에도 정각사는 시대를 앞서 신도들의 교양을 위해 수준 높은 대중강좌를 열었는데, 전각가로 유명하신 안광석 선생, 한국 다도(茶道)를 대중화시킨 효당 최범술 스님(만해 한용운스님의 제자) 등을 모셔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광우스님은 평생 후학 양성을 위해 시주금을 기꺼이 내어놓는 ‘학승(學僧)의 대모(代母)’로도 통했습니다. 스님은 돈이 생길 때마다 절 살림을 늘리기보다는 한 명의 인재라도 더 공부할 수 있도록 후원했습니다. 현재 불교계 안팎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중진스님들 중 많은 스님들이 광우스님의 학비 지원으로 공부를 마쳤습니다.

광우스님은 전국비구니회를 조직하고 후학들의 공부를 지원하며 각종 장학회 사업을 운영하던 중 서울시로부터 양천구 목동에 설립된 청소년회관을 위탁경영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관장으로 취임했습니다. 목동청소년회관은 불교계가 위탁받은 최초의 사회복지시설로, 광우스님의 지도하에 전국 비구니회가 실질적으로 운영했습니다. 이런 공로로 스님은 1992년 청소년 지도육성 유공자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습니다.

광우스님의 행보는 국내의 포교활동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한국불교의 위상을 세계적으로 알리고, 전 세계 여성 불자들이 협력하여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다양한 국제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그 중 2004년 서울에서 열린 ‘제8차 세계여성불자대회’ 개최는 한국불교의 위상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세계여성불자대회는 1987년 인도의 캘커타에서 처음 창립된 이후 격년으로 세계를 순회하며, 주로 여성의 인권, 교육, 환경 문제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고 연대를 강화하는 대회로, 광우스님은 1987년 이 단체가 처음 창립될 때부터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한국불교의 세계화에 앞장섰습니다. 이러한 해외 불교활동의 업적을 인정받아 1998년에는 스리랑카 사르보다야 SASANA KEERTHI SRI 명예상을 수상했습니다.

한국불교에 대한 광우스님의 남다른 애정은 멀리 중국에까지 미쳤습니다. 광우스님은 그동안 아무도 관심을 갖지 못했던 중국 구화산의 김교각 스님의 육신불 봉안에 거금을 쾌척하셨습니다. 중국 구화산의 김교각 스님은 신라시대 중국으로 건너간 신라의 스님으로, 현재 김교각 스님이 모셔진 구화산은 중국의 4대 성지입니다. 지장보살의 현신으로 추앙받는 김교각 스님을 모신 화성사에 육신불을 모시는 육신보전을 건립한다는 소식을 듣고 스님께서는 남몰래 보시를 희사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광우스님은 15살 때인 1939년 직지사로 출가한 후 출가 80여 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한국 불교의 발전을 위해 힘쓴 선지식으로 많은 제자들과 불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늘 조용한 웃음과 반듯한 몸가짐, 따뜻한 마음으로 제자들을 이끌어주는 스님의 인품은 제자들의 귀감이었습니다.

광우스님께서 주석하신 정각사는 작은 절입니다. 불교계에 미친 스님의 영향력과 업적에 비하면 초라하고 비좁습니다. 광우스님께서 평생 거의 모든 사찰의 수입을 정각사 불사보다는 국내외 어려운 학인스님을 돕는 일과 각종 장학사업과 군부대, 교도소 지원 사업, 비구니회관 건립 등에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스님께서는 삼선동에 정각사 도량을 연 후 50여 년 동안 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도왔지만 정작 당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타적 삶으로 일관하신 것입니다.

광우스님의 생신날이면 제자들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근처에 사시는 독거노인을 정각사로 초대해 따뜻한 공양(밥과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당신을 위한 화려한 축하보다는 어려운 이웃에게 정성이 담긴 밥 한 그릇을 나누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여기셨던 스승의 뜻을 제자들이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광우스님은 상좌 정목스님에게 주지를 물려주시고 회주로 주석하시며 보임에 진력하시던 중 2019년 7월 18일 세수 95세, 법랍 80세로 서울 성북구 삼선동 망월산 정각사에서 정목 등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떠나는 바람은 집착하지 않는다. 그저 왔다가 갈 뿐이다.”는 임종게를 남기고 홀연히 세연을 다하셨습니다.

이날 밤 망월산 마루 위에는 휘영청 밝은 달이 떠올랐고, 그 환한 빛이 세상을 고루 비추었으니, 광우스님은 저 쿠시나가르에서 부처님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전법을 그치지 않은 것처럼 평생 수행을 통해 증득한 밝은 지혜(光)를 달빛에 담아 중생들에게 빗줄기(雨)처럼 회향하신 것입니다.
光雨스님 연보

1925년 12월 11일 경상북도 군위군에서 출생
속명 이광우(李光雨), 법명 광우(光雨), 법호 태허(太虛)

득도 및 수행

  • 1939년 직지사에서 성문(性文)화상을 은사로 득도
    남장사에서 혜봉(慧峰) 대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직지사 서전 비구니선원에서 안거
  • 1940-41년 동화사 부도암에서 안거
  • 1944년 남장사에 개설된 최초의 비구니 강원 ‘관음강원’에서 대교과 졸업, 이 기간 중 혜봉 대화상에게 <법화경> 사사
  • 1945년 선산에 문수사를 창건하고 혜봉 대화상 지도로 <선문촬요> 등 선어록 강독
  • 1956년 뇌허 김동화 박사의 권유로 비구니로서는 최초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동국대 졸업 후 남장사에서 100일기도 성만 후 대전 세등선원 조실 고봉(古峰)선사 문하에서 정진
  • 1958년 부산 소림사에서 비구니 금룡(金龍)스님에게 건당하고 당호 ‘태허’를 받음
  • 1960년 서울 청룡사에서 자운(慈雲) 스님을 계사로 보살계와 비구니계 수지

포교 및 사회활동

  • 1956년 부산 소림사에서 법화산림(法華山林)을 시작하여 10년 동안 매년 법회
  • 1958년 김동화 박사의 권유로 서울 성북구 삼선동에 망월산 정각사 창건하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김동화, 홍정식, 원의범, 황성기, 홍영진, 김대은 등 당대 최고의 교수진을 초빙해 어린이법회, 중고등학생법회, 대학생법회, 일반법회 개설 운영. 또한 매년 일주일간 법화산림 개설
  • 1969년 월간<신행불교> 창간. 사찰에서 간행한 최고수준의 문서포교 전문잡지로 평가받은 <신행불교>는1996년까지 27년 동안 통권 324호 발행
  • 1968년 불교청소년교화연합회 심사분과위원장 역임
  • 1970년 정각회 장학회 발족하고 동국대 선학과 학인에게 매년 장학금 지급
  • 1985년 대한불교조계종 비구니 별소계단(別所戒壇)의 증사(證師)로 추대되어 1994년까지 수계산림 지도
  • 1986년 환갑을 맞아 묘법연화경 전7권을 사경 및 법화경을 새로 번역해 3천부 간행하여 전국 사찰과 주요 불자들에게 배포
  • 1989년 서울시립 목동청소년회관 관장 두 차례 역임하며 대통령 표창 수상
  • 1995년 전국비구니회 회장 선출. 제6~7대 회장 역임하며 비구니 숙원사업이었던 비구니회관 건립에 주도적 역할 담당
  • 1996년 대한불교조계종 비구니 별소계단 전계대화상에 추대
    불교텔레비전 이사 취임
  • 1998년 인도 보드가야에서 열린 국제삼단대계 계단의 교수아사리에 추대
  • 2007년 대한불교조계종 종단 사상 최초로 비구니 최고 법계인 명사(明師, 비구의 대종사에 해당)에 추대

포상

  • 1973년 청소년교화연합회 공로상
  • 1992년 청소년 지도육성 유공자 대통령 표창
  • 1998년 스리랑카 사르보다야 SASANA KEERTHI SRI 명예상

저술

  • <묘법연화경> 번역, <신행법요집> 편역, <부처님 법대로 살아라> 등
[동화사 부도암에서]

광우스님의 은사스님이신 성문스님께서 동화사 부도암에 선방을 열자, 광우스님은 도반들과 함께 참선과 경학을 공부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도반인 벽안스님, 네 번째가 사형이신 태호스님, 다섯 번째 앉아있는 분이 태한스님, 그리고 맨 앞줄에 앉아 있는 분이 광우스님이시다.

[2007년 해인사에서 열린 명사법계 품서식]

스님은 조계종 사상 처음으로 비구니로서 명사법계를 받았다.
사진의 뒷줄 왼쪽부터 지원스님, 묘엄스님, 광우스님, 정훈스님, 명성스님, 아랫줄 정 가운데 종정이신 법전스님, 그 왼쪽 옆에 계신 분이 총무원장 지관스님이시다.

바르게 믿고 바르게 행하여 참 사람 되자

- 광우 큰스님 -